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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팀 조회수 1819 작성일 2018-11-01 오후 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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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을 어찌할고 하니 / 노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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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을 어찌할고 하니

노 혁 준

편집위원,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권력은 무상하고, 재벌은 무한하다. 서슬퍼렇던 정권의 주역들이 철창신세를 지면서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는 일이 다반사이고 이러한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어느 장삼이사에게 그 자식이 대통령과 재벌총수 중 어떤 것이 되었으면 하냐고 물으면 재벌총수라고 답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영화화되기도 했던 현대소설 중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저)이라는 것이 있다. 겉으로는 모범생 반장이면서도 내면으로는 야비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휘어잡고 있는 엄석대, 서울학교에서 지방학교로 전학 와서 엄석대의 지배에 항거하지만 서서히 굴종의 열매를 즐기게 되는 나(병태). 이 소설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담임선생님이다. 엄석대를 별로 제지하지도 않는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자잘한 잘못이 있더라도 엄석대를 통해 반의 규율이 잘 잡히고 외면적으로는 좋은 지표가 나타나므로 굳이 엄석대를 어찌할 이유가 없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까. 감독당국 내지 규제자의 속내는 원래 그런 것이다. 매정하게 몰아붙이다가도 경제활성화라는 목표에 다가서서는 재벌에 슬그머니 손을 내밀곤 한다. 재벌들도 이를 알기에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대응하곤 한다.

재벌의 완전한 해체론자는 실제 주변에서 찾기 어렵다. 그들의 공과를 인정하면서 제대로 된 규율을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선단식 경영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중소기업 중심으로 구성된 강소국가들이 삼성, LG, 현대차 등을 보유한 한국을 부러워하는 이유이다. 이른바 오너가 없는 포스코, KT 등의 사례는 반면교사일 수 있다. 뚜렷한 지배주주가 없는 상태에서 정권의 부침에 따라 휘청거리는 것을 보면, 그보다는 차라리 지배주주가 있는 재벌구조가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재벌 문제의 핵심에는 경영권 유지 및 그 승계가 자리한다. 승계가 이루어져야 재벌은 ‘무한’할 수 있다. 많은 경우 각종 편법거래의 밑바탕에는 부모가 그 자식세대에 경영의 대물림을 하려거나 또는 일단 경영권을 승계한 자식이 이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가 깔려 있다. 창업주가 자신의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나아가 자녀들에게 일생의 필업을 물려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러한 사정은 미국 등 다른 선진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는 복수의결권 주식제도는 이를 반영한다. 이에 따르면 지배주주 측은 이사 선임 등 주요 사안에 대하여 다른 이들보다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을 보유한다. 이러한 복수의결권주식은 창업주가 타인에게 양도하면 보통주식으로 바뀌는데, 상속은 이러한 보통주식화(化)의 예외사유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복수의결권 주식제도의 비중은 2005년 IPO 중 1%에 불과하던 것이 2017년에는 22%에 달할 정도가 되었다. 또다른 예로서 북유럽에서는 이른바 공익적 재단을 활용한 부의 실질적인 승계가 용인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복수의결권주, 공익적 재단에 관한 논의가 있다. 효율적인 규제는 개인의 이기심을 잘 제어하면서도 유인부합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유인에 부합하지 않는 제도를 만들면, 탄탄하게 구성된 재벌의 관련업무 팀들은 규제망의 빈틈을 어떻게든 찾아서 시간을 끌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존 재벌에 복수의결권주를 허용하는 방안은 수용되기 어렵다. 미국 등 사례는 이미 상장 이전에 복수의결권주가 발행되는 것을 전제한다. 즉 이미 상장된 회사가 다수결로 정관을 개정하고 일부 주주에게만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하는 행위(이른바 mid-stream change)는 허용되지 않는다. 기존 투자자를 해할 가능성이 높은 복수의결권주식 제도의 신규도입은 재벌뿐 아니라 일반 상장사에도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반면 공익적 재단의 경우 추가논의의 여지가 있다. 적절히 규제된 재단을 매개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은 복수의결권 주식제도의 중도도입보다는 해악성이 덜하다. 출구 없이 재벌지배구조의 혁신만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지배주주가 없는 분산소유구조를 이상형으로 강제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한편 어느 방안을 택하든 시장을 통한 엄정한 감시는 규제당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표소송 등 각종 소수주주권의 활성화를 담은 상법개정안이 통과되어야 할 이유이다.

단발적인 재벌 손보기를 넘어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위 소설에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새로운 담임선생이 오면서부터이다. 답안지 바꿔치기와 같은 사술 없이 공정한 룰을 적용하도록 원칙으로 돌아갔을 때이다. 권력도 무한할 수 있다. 다만 공정한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의 지속적인 검증을 통과한다는 전제로 비로소 그러하다. 시장의 감시를 받지 않는 영속적 재벌은 필연적으로 부패한다. 재벌총수 및 그 일가에 대한 준열하고 폭넓은 손해배상책임 추궁과 충분한 정보공시를 통한 시장감시법제를 확충할 이유이다. 이를 전제로 그들의 유인도 감안한 법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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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6 호 | 발행일 2018년 09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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